‘가요무대’ 유심초 유시형 동생 유의형,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결혼 부인 자녀 나이 학력 고향 가족” 프로필
‘가요무대’ 2022년 11월 14일 미리보기 / 22:00 방송
1773회 - 명시, 명곡이 되다
◎ 가요무대 출연진
01. 개여울(정미조) / ‘가요무대’ 안다미
02. 향수(박인수,이동원) / ‘가요무대’ 배일호
03. 부모(유주용) / ‘가요무대’ 조성희
04. 모란 동백(조영남) / ‘가요무대’ 진시몬
05. 동심초(권혜경) / ‘가요무대’ Sop.신델라
06. 목포의 눈물(이난영) / ‘가요무대’ 최유나
07. 꿈꾸는 백마강(이인권) / ‘가요무대’ 이현승
08. 비 내리는 고모령(현인) / ‘가요무대’ 강민
09. 내 곁에 있어주(이수미) / ‘가요무대’ 진소리
-10.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유심초) / ‘가요무대’ 유심초
7080세대 포크가수인 유심초의 간판곡 <사랑이여>는 한편의 시를 읽은 느낌이 든다. 1975년 데뷔한 유심초는 인천출신의 형(유시형)과 동생(유의형)으로 이뤄진 듀엣그룹 입니다.
아름다운 화음을 선보이며 가요계에 데뷔한 이들은 준수한 외모와 감미로운 하모니로 1970~80년대 젊은이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누렸습니다.
<사랑이여>는 이명박 대통령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기간 때 이 대통령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 때 ‘18번 노래’(애창곡)를 묻자 “노래방 세대가 아니다. 유심초의 <사랑이여>, 노사연의 <만남>, 양희은의 <아침이슬>, 윤항기의 <이거야 정말> 등을 좋아 한다”고 했다. 이중 <만남>은 가수와 친해서라며 ‘이 노래가 최고’라고 추켜세웠습니다.
최용식이 작사·작곡한 <사랑이여>는 4분의 4박자, 슬로우록 풍이다. 별, 꽃, 꿈, 사랑 등의 단어가 노랫말 사이사이에 나와 친근미를 더해준다. 노래가 히트하자 다른 가수들도 리메이크해 불렀다. 특히 가요계 50년인 패티 김과 조영남이 듀엣으로 부른 <사랑이여>는 눈길을 끕니다.
<사랑이여>가 만들어지기까진 에피소드들이 많다. ‘노래를 부르고 싶어 가수의 길로 가겠다’는 아들과 ‘절대 노래할 수 없다’는 완고한 가수출신 아버지의 줄다리기 끝에 탄생됐습니다.
유심초 멤버인 두 아들은 중·고교 때부터 통기타에 능했다. 1970년대 초부터 고향인 인천의 다운타운무대에서 활동했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 앞에 서는 ‘끼’가 있었던 셈입니다.
형제가수 ‘유심초’ 1981년 취입 대히트
두 살 터울인 이들은 1975년 가요계에 데뷔했다. 대학가와 다운타운에서부터 인기를 얻어 앨범을 낸 독특한 경우다. 음반을 낼 때 형 유시형씨는 한국외국어대에서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어와 무역학을, 동생 의형씨는 한양대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습니다.
의형씨는 노래동아리에서 활동했던 형이 친구들과 방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다 나가면 몰래 그 방에 들어가 형이 부르던 트윈폴리오노래나 팝송을 흉내 내곤 했다. 형은 우상이었고, 자신도 노래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시형씨는 그런 동생이 대학에 입학하자 ‘듀엣을 만들자’고 권했다. 이렇게 팀을 이룬 둘은 전국대학축제를 통해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때 찾아온 음반기획자 제안으로 1978년 첫 음반을 냈다. 제대(1974년)한 형과 대학생 동생은 가수 윤형주와 이종용의 도움으로 데뷔앨범 <너와의 석별>, <너>를 냈습니다.
그러나 활동이 순탄하지 않았다. 엄한 아버지 때문이었다. 수시로 부친의 반대에 부딪혀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가수보다 노래가 더 유명한 <너와 나의 석별>을 비롯해 가수 이종영의 노래로 더 잘 알려진 <너>도 유심초의 노래다. 따지고 보면 <너와 나의 석별>(1978년)이 그들의 데뷔곡이자 첫 히트곡 입니다.
첫 앨범 수록곡 <너와 나의 석별>이 히트한 뒤 두 사람은 학업과 입대를 이유로 중간 중간 공백기를 가지면서도 짬짬이 활동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의형씨는 1978년 대학을 졸업하고 노래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부친이 또다시 반대해 한 동안 가수의 길을 접었다. 그러길 2년이 흘렀다. 1980년 부친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제 하고 싶은 노래를 불러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노래 금지령’ 족쇄가 풀린 그들은 음반제작을 준비했습니다.
가수의 길로 본격 접어든 것은 1981년. 그해 발표한 앨범에서 <사랑이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히트하면서다. 길거리를 지나다니지 못할 만큼 인기였다. 지방공연 땐 팬들이 유심초가 탄 차에 올라타려고 해 백미러를 여러 번 망가뜨렸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바뀌어가는 가요계 분위기로 1985년 그룹을 해체했습니다.
3집 앨범을 내고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한 것이다. 포크음악이 사양길을 걷자 형 시형씨가 미국 이민을 떠났습니다.
13년 만에 재결합…미사리 등에서 인기1990년대엔 활동을 거의 접다시피 했다. 이들 형제는 2000년대 바람 새의 포크 부활캠페인 ‘잃어가는 우리 꿈을 위하여’ 덕분에 다시 뭉쳤다. 유심초가 해체된 뒤 라이브카페 붐이 일면서 뒤늦게 <사랑하는 그대에게>가 카페 최고인기곡으로 떠올랐다. 형 시형씨는 가수 백영규와 친한 벗 사이다. <슬픈 계절에 만나요>는 유시형이 백영규가 부르도록 양보한 곡으로 훗날 크게 히트했습니다.
동생 의형씨가 2001년 먼저 컴백한 뒤 2004년 2월 재결합, 왕성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다. 팀 해체 뒤 13년 만입니다.
중년이 된 유심초는 요즘 다시 무대에 서고 있다. 세월은 갔어도 아름다운 하모니는 여전 합니다.
“유심초란 이름으로 다시 활동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미국으로 떠나면서 음악세계에서도 완전 떠난다고 생각했거든요. 주변에서 ‘언제 복귀하느냐’고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그 쪽에서 하던 사업이 있어 다시 음악을 할 형편이 아니었어요. 이번에도 동생이 아니었으면 결정하기 어려웠을 거예요.”(형 유시형)
유심초의 재결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의형씨다. 둘은 해체 뒤 가수가 아닌 생활인으로 살아왔다. 가족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시형씨나 국내에 남은 의형씨 모두 사업에 몰두하느라 노래와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유심초가 무대로 되돌아온 건 팬들의 뜨거운 요청 때문이다. 경기도 미사리 일대 라이브카페가 활성화되면서 유심초의 히트곡을 신청하는 팬들이 늘기 시작했던 것. 결국 의형씨는 미국에 있는 형을 대신할 기타연주자를 영입, 2001년부터 유심초란 이름으로 먼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04년 2월 의형씨의 끈질긴 권유로 시형씨는 미국생활을 접고 돌아왔다. 유심초로 다시 뛰기 위해서다. 유심초는 미사리의 한 라이브카페와 계약을 맺고 무대에 섰습니다.
형제는 각각 슬하에 노래 솜씨가 빼어난 남매와 두 딸을 두고 있습니다.
유심초 프로필
위키백과 유심초 유시형은 1951. 6. 27일생 유의형은 1953. 4. 9일생
유심초는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이다. 유시형, 유의형 두 형제로 구성된 2인조 음악 그룹이며 1975년 《너와 나의 석별》로 가요계에 데뷔했다
대표곡은 《사랑이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사랑하는 그대에게》 등이 있으며 1985년 해체되었으나 현재에도 가끔씩 활동하고 있다.
앨범
1집 《나는 홀로 있어도》
2집 《날 잊지 말아요》
3집 《우리는 타인》
형 유시형(1951년생) : 외국어대학교 국제통상학 말레이시아어 전공
동생 유의형(1953년생) : 한양공대 산업공학과
‘가요무대’ 유심초 유시형 동생 유의형,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결혼 부인 자녀 나이 학력 고향 가족” 프로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