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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극장

인간극장 하의도 노부부, 박행순 윤수자 그대와 백년해로 “66년째 결혼 나이차 1남 6녀 자녀 제방 미역 다시마 고향 첫째 딸 미나 지윤 가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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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극장 하의도 노부부, 박행순 윤수자 그대와 백년해로 “66년째 결혼 나이차이 1남 6녀 자녀 제방 미역 다시마 고향 첫째 딸 미나 지윤 가족사”


1월 22일 예고편 / 07:50 방송
2024.01.19 17:10:22조회수 886
그대와 백년해로

방송일 : 2024년 1월 22일(월) ~ 1월 26일(금) / 오전 7:50~8:25
방송매체 : KBS1-TV
보도자료 문의 : 윤지윤 취재작가  (02-782-8222)

박행순 윤수자 하의도 노부부
전남 신안에 자리한 섬 하의도. 이곳 바다에는 다시마를 키우며 살아가는 동갑내기 부부 박행순, 윤수자씨가 산다. 함께한 세월만 66년째. 넉넉지 못한 살림에 1남 6녀 키우느라 손에서 일을 놓아본 적 없다는 아내와 그런 아내를 '귀여운 수자씨'라 부르며 남다른 부부애를 과시하는 남편. 아내를 위해 집 앞에 만든 계단 길을 '수자씨 고속도로'라고 이름 붙이는가 하면, 딸들이 만든 인터넷 가족카페 이름 역시 '귀여운 수자씨'로 정할 정도다. 이 부부에겐 특별한 계획이 있다. 10년 뒤 하의도 제방길에 문주란을 심어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이곳을 사회에 환원 하겠다는 것. 바다를 닮아 마음이 넉넉한 동갑내기 부부. 하의도 바다에서 삶을 꾸리며 꿈을 키워나가는 언제나 청춘인 부부를 만나보자.
박행순 윤수자 부부 새우 미역 다시마 나이 직업 판매 가격 위치 택배 주문 방법 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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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도 제일가는 잉꼬부부, 박행순(86) 씨와 윤수자(86) 씨의 소원은 백년해로. 
단순한 상징이 아닌, 실제로 100년 동안 함께 살아가는 것이 부부의 목표다. 
눈 나쁜 아내가 넘어질까 손을 놓지 않는 남편과 
손가락이 굽은 남편의 옷을 입혀주고, 반찬을 놓아주는 아내. 
금실 좋은 부부는 ‘결혼 100주년’을 위해 
아침마다 섬과 섬을 잇는 대교를 걸어서 산책하고, 
‘인생에 후퇴는 없다’를 외치며, 매일 바다 일을 한다.
19살, 청춘에 만나 첫눈에 반하고 스무 살에 결혼했던 부부. 
66년 동안 한결같이 서로를 아끼고 보듬으며, 
1남 6녀의 자식을 번듯하게 키워냈다. 
남 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는 부부지만, 
사실, 부부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힘든 날들을 견뎌내야 했다. 
꽃게 유통 사업을 하면서 승승장구하던 행순 씨, 
그러나 불행은 한순간에 찾아왔다. 

사업의 부도로 빈털터리가 되고… 
그때, 다시 일어서기 위해 생각했던 것이 제방을 쌓는 것. 
예순이 넘은 나이지만 바다에 지주목을 세우고, 
밤낮없이 돌을 나르며 4년 동안 악착같이 일했다. 
결국, 350미터의 제방을 쌓고, 4만 평의 토지를 만들었고 
그곳에 새우 양식장을 만들어 재기에 성공했다. 
그렇게 인생의 태풍이 지나가고, 부부는 서로를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됐다. 
한편, 늘 자식들과 함께 살고 싶은 꿈이 있었던 행순 씨 부부.
최근 4년 동안 딸들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현재 7명의 자식 중 4명의 딸이 부모님 곁에서 생활하는 중…
자매들은 부모님을 도우며 바다와 양식장에서 일하고 있다. 
결혼 66년째,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아온 행순 씨와 수자 씨 부부. 
백년해로의 꿈을 향해, 오늘 또 하루를 살아간다. 

# 첫사랑 그녀와 66년 째 사랑중
하의도의 소문난 잉꼬부부, 박행순(86) 할아버지와 윤수자(86) 할머니. 
하루 종일 붙어있는 건 보통이고, 
언제 어디서나 맞잡은 두 손은 잠드는 순간까지도 놓지 않는다. 
목포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서로에게 첫눈에 반했던 열아홉 청춘들.
스무 살에 백년가약을 맺고, 그로부터 66년의 세월이 흘렀다. 
갈래머리 소녀는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지만 
행순 할아버지에게는 여전히 ‘귀여운 수자 씨’일 뿐.
눈 나쁜 아내를 위해 화장실 청소를 해주고, 
대신 글씨를 읽어주는 행순 할아버지와 
손가락이 굽은 남편을 위해 옷을 입혀주고, 반찬을 놓아주는 수자 할머니. 
함께했던 시간만큼 애틋함은 커지고,
서로의 ‘눈과 손’이 되어 살아간다.
방 한가득 아이들을 낳아달라던 시어머니의 당부대로 
1남 6녀를 낳아 모두 대학까지 보냈고,
금실 좋은 부모님을 보고 자란 자식들은 모두 연애 결혼을 해 번듯한 가정을 이뤘다. 
그러는 동안, 큰소리가 담장 한번 넘은 적 없다는 부부. 
남 부러울 것 없는 부부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진 세월을 견뎌내야 했다는데.

# 맨손으로 제방을 쌓은 부부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힘들게 자라, 
무일푼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던 행순 할아버지. 
여러 가지 바다 일을 하면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뒤이어 시작한 꽃게 유통 사업도 나날이 번창했다. 
그러나 불행은 한순간에 찾아왔다...
꽃게의 고갈로 인해 30여 척의 배에 빌려줬던 돈을 받지 못하게 된 것. 
빚은 사업의 부도로 이어졌고,
부부는 모든 걸 잃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인생의 밑바닥에 선 순간,
다시 일어서기 위해 제방을 쌓기로 결심한 행순 할아버지 부부. 
예순이 넘은 나이였지만 
바다에 지주목을 세우고 밤낮없이 돌을 날랐다. 
4년간의 대공사가 이뤄지고… 
결국, 350미터의 제방을 쌓고, 4만 평의 땅을 만들어냈다. 
그곳에 새우 양식장을 만들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부부.
그러는 사이, 행순 할아버지의 손가락은 비틀리고 굽어졌고, 
너덜너덜해진 복근 탓에 허리는 펴기조차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맨손으로 제방을 쌓아올려 재기에 성공했지만, 휘고 굽은 손가락은 아픈 훈장으로 남았다.

# 딸들이 돌아왔다!!!
팔순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바다에서 미역, 다시마 양식을 하고, 
새우양식장에서 일했던 행순 할아버지와 수자 할머니. 
그런 부모님을 위해 4년 전, 첫째 딸 미나 씨를 시작으로 
딸들이 줄줄이 고향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난해, 둘째 딸 미경 씨 부부와 다섯째 딸 지윤 씨가 돌아왔고, 
결혼해서 쭉 섬에 살고 있는 여섯째 딸 서현 씨까지.
7남매 중 4명의 자매가 부모님 곁에 모여 사는 중~
사실, 모든 자식들을 불러 모아 함께 살고 싶은 꿈이 있었던 행순 할아버지. 
막연했던 꿈이 이제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부모님을 도와 양식장 일을 거들기 시작한 자매들.
다시마 종자를 뿌리기 위해 배를 띄우고, 호기롭게 배 운전에 도전한다. 
이 모든 걸 지켜보는 매서운 눈빛의 남자. 
‘백전노장’ 행순 할아버지는 바다에서 만큼은 누구보다 무서운 호랑이 선장님이 되고,
그런 그의 눈에 딸들은 아직 풋내기일 뿐.
진두지휘하며 나서는 아버지 밑에서 딸들은 부모님의 바다를 배워가는 중이다. 

# '백년해로'의 꿈은 이루어질까?
여전히 종횡무진 바다를 누비는 행순 할아버지. 
청춘 부럽지 않은 열정의 사나이에게는 일생일대의 목표가 남아있다. 
바로 사랑하는 아내와의 ‘백년해로’.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100년 동안 함께 살아가는 것이 부부의 목표. 
그러려면 120살까지 살아야 하는데… 
‘결혼 100주년’을 향한 행순 씨의 노력은 끝이 없다. 
매일 아침 아내와 산책하기, 안마기로 온 몸 마사지하기...
기억력 증진을 위해 지구본으로 세계지리를 공부하는가 하면,
평생 쓰지 않던 왼손으로 일기까지 쓰기 시작했다. 
한편, 행순 씨에게 남은 또 하나의 숙제. 
가장 힘든 시절 큰 도움을 줬던 은인을 만나는 것이다. 
그 은혜를 잊지 않고자 비석에 이름까지 새겨두었는데,
은인을 만나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은 점점 커져가고...
과연, 더 늦기 전에 그의 바람은 이뤄질 수 있을까? 
기나긴 세월 동안 절대 변치 않던 서로를 향한 마음. 
인생의 종착지에 다다르기 전...
‘백년해로’의 순간에 머무를 수 있기를 소원하며
부부는 오늘 또 하루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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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줄거리
여든여섯 동갑내기 부부, 행순 씨와 수자 씨. 
66년 동안, 한결같이 서로를 아끼며 살아왔다. 
사업의 부도로 힘든 시절, 
직접 돌을 옮겨 제방을 쌓았던 행순 씨 부부.
부모님을 위해, 
세 딸과 사위들은 고향에 돌아와서 일을 거들고 있다. 
어느 날, 아내가 보이지 않자
행순 씨, 아내를 찾아 나선다!

연출 :  지현호
글 :  홍현영
조연출 :  전유진
취재작가 :  윤지윤

윗마을, 유호리에서 태어났어요. 오림2구죠. 거긴 바다 없어요. 제가 나이로 그냥
계산해서, 27살 때 부터 바다 일을 했어요. 여기 오기 전에. 그 당시 해태를 했어요.
해태 해가지고 한 4-5년 됐던가 해서, 잘되고 해서 여유가 생겨서 여기(봉도) 끝에다
집을 짓게 됐어요. 여기 살면서 해태도 하고, 미역포자 배양도 하고. 그 당시에 다시
마가 없었기 때문에 미역하고 김만 조금 하다가, 여기가 원래 여객선 정착지입니다. (
배들이) 전부 다 닿았어요.


봉도 꽃게 파시의 시조
여기서 무슨 현상이 일어났냐면, 1970년대일거요. 배가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하드
라고요. 배가 들어오는데, 그 배들이 이 바다에서 꽃게를 잡아오는데, 여기가 나리끝
이고 그러기 때문에 팔다 못 팔면 객선으로도 보내고, 사람들이 빈번이 오고. 꽃게가
가을에 막 나오면 굉장히 싸요. 지금 돈으로 해서 지폐인데, 백원에 열 몇 마리씩 합
디다. 그 당시에. 열세마리씩. 아, 그런데 그놈이 조금 있다 보면은 1킬로에 200원,
300원으로 올라갑디다. 한 마리에 50원씩 해서 7-80원씩 올라가요. 그러니까 엉뚱
하게 비싸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난중에 눈 폭폭 오고 깊은 시안이 닥치면 더 올라
가요. 1킬로에 7-800원까지 올라가요. 두 마리나, 세 마리에.
 
그래서 그놈을 보고, 저 놈을 가지고 있다가 팔면 값이가 좋을 텐데... 그래서 그것
을 생각하고 그 당시에 염전이 있으니까, 염전 저수지에 길러 봤어요. 그런데 얼마나
나오는가 봤더니, 한 30%가 살아남습니다. 그대로 방치했더니, 그런데 나중에 30%
만 나와도 괜찬다 했는데, 차츰 하니까 개선돼 가지고, 7-80%, 8-90%가 나오데요.
시세 더 주고 사도 암놈을 사다가 넣어두면 시세가 올라가니까. 숫놈을 그렇게 안
올라가고. 그것이 일종의 축양업인데, 축양업을 하다 보니까, 제가 염전이 10여정이
있었는데 염전 저수지가 적고 하니까 염전을 팠어요. 장비를 갖고 팠어요. 포크레인
을 2대를 사다가 똘로 쭉 팠어요. 밖에다 막고, 나 외에도 딴 사람들도 더러 했어요.
그것이 한참 서로 경쟁이 붙으니까 이 사람들(꽃게배 선주들)이 잘 안 팔라고 해요.
잡는 사람들이. 잘 안 팔라고 해요.
그래서 와리로 한 것이죠. 받아주면 얼마를 살려 준고 하니. 예를 들어 10킬로를 받
으면 5킬로를 내 주기로 하고, 그러면 죽어 불고, 7킬로가 남으면 2키로가 남잖아요.
8킬로가 살면 3킬로가 남고. 쉽게 말하면 전당포처럼 했어요. 그 사람들이 와서 축양
장에 와서 맡긴다는 거예요. 파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키웠다가 나중에 받을란다. 그
래 가지고 몇 개 회사가 붙어가지고 서로 사오고 그러니까, 나는 양어장이 원래 염전
이 10정 되고, 나머지가 2정 해서 12정, 밖에 땅까지 하면 15정 정도 됐을 것이요. 우
리 땅에다 다 이용을 못하니까, 회사들한테 빌려주고 빌려준 삯을 적당히 좀 받았죠.
나는 왜 축양장을 유치하려고 했냐면, 선구점도 했지만, 기름, 주류라든지, 피복 같
은 뱃사람이 필요한 것을 많이 대 줬기 때문에. 장사가 됐기 때문에 배를 들어오라고
한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파시가 된 거예요. 많이 되니까, 많을 때는 한 30척씩 들어
옵디다. 매일 들어와요. 밤에 들어왔다가 나가고. 매일같이, 한 10여년 나마 그런 짓거
리를 했을 것이요. 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했어요. 그것을 보고 파시라고 했지요. 

배석자리가 좋은 자리가 있다
60년대에는 내가 알기로는 배가 쪼금 들어왔고, 꽃게배가, 그리고 대개 배가 영세
했어요.
(당시에 배가 들어온 이유는 여객선으로 낼려고 들어온 것인가요?) 첫째는 여객선
이 다니니까 편리한 점이 많았겠죠. 객선으로 보내기도 하고 받아오기도 하고, 내가
장사를 한 것은 60년대 부터 했는데, 우리한테 물건을 구입하러 많이 들어왔어요.
도서 문화유적 지표조사 및 자원화 연구 | 하의면 | 137
 
(60년대는 안 하신 것 아니예요?) 장사는 쭉 했어요. 그래서 결국은 파시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파시비슷하게 했지요. 그래서 여기 보면 잘잘한 2층집들 있습디까.
(그 2층 집들이 장사한 집들인가요? 선생님은 기름, 피복을 했고, 술을 팔거나 식
당은?) 옆에 집들이 했어요. 잠은 재워줬지만 여관은 아니였지요. 식당은 서너집이 했
을 것이요. 몇 집 안했어요.
(식당 겸 술집이요?) 예, 우리가 소주 도매업을 했어요. 하의도에서 많이 팔 때는 한
3천 상자를 팝디다. 열대짜리 보해 나무상자에 들어간 소주가 3,400상자까지 팔립디
다. 그렇게 많이 팔았어요.
(술이 다 선생님을 통해서 들어와요?) 예, 보해양조하고 조선맥주하고.
(그러면 연도를 한 번 따져볼까요? 30살이라고 하면 43년 전이죠, 60년대 말이네
요.)그러것소. 우리가 장사를 하고 나서 바로 파시가 형성됐으니까.
(그 당시에 동네사람들은 장사를 안했어요.) 그런 것이 없었어요.
(꽃게배들 때문에 장사를 하신 건가요?) 실은 장사라는 것이 배도 들어오지만은 나
룻배가 왔다 갔다 합디다. 객선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고.
(객선은 언제까지 다녔습니까?) 안다닌지가 20년도 안됐을 겁니다. 15년도 안됐겄
소. 우리가 부도난 뒤에도 배가 쭉 다녔으니까. 면이 분리되면서.... 철부선 다니면서
여기에 안다녔어. 내가 알기로는, 농협 철부선 다니기 전에는 계속해서 다녔죠.
(그 당시에 웅곡은 그래도 큰 곳이었잖아요?) 그렇지요. 그래도 배는 여기보다 안
닿았죠. 거기는 객선이 정박도 안하고. 별배 안 닿았어요. 지금이 배들이 많이 닿제,
여가 항상 배가 많이 다녔죠. 지형적으로 여기가 ‘석’이예요.
여기는 정등이 바다인데, 배 설 자리가 하나도 없어요. 정등해. 예를 들면 시하해.
여기가 시하해예요. 저 너머가 만호해. 그러지요. 바다 이름이.
(여기는 정등이라는 지명이 어디서 왔어요?) 그러니까 해도에 그렇게 써 있어요. 그
래서 그것을 보고 읽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아래로 배석이 없어요. 진도 서망 쪽으
로 올라오면 하나도 없어요. 여기가 배석이 못돼요. 물이 써 버려요. 그라고, 이 안에
가 배석이 있어요. 북서풍이 불면 의지할 수 있어요. 여기가 툭 터진 곳인데 여가 배
석자리가 못돼요. 도초 아래쪽에도 없고, 도초하고 비금 사이에 서남문대교라고 있
죠. 거기가 배석자리가 돼요. 그 다음에는 배석자리가 없어요. 그래서 예로부터 소흑
산도 있지 않습니까, 소흑산도 배가 목포에 들어갈라면 반드시 여기에 왔어요. 우리
선조도 소흑산도에서 왔습니다만, 여기서 쉬어 갈라고, 석이 없으까. 우리 선조도 소
 
흑산도에서 왔지만, 그런 자리는 다 부락이 있어요.
(가거도에서 와서 멈췄다는 곳이 어디예요?)바로 여깁니다. 이 안쪽에
(여기를 뭐라고 불렀어요?) 덜겅머리 끝.
(그런데 여기는 마을이 있었어요?) 여가 집이 몇 가구가 있었어요. 그라고 여가 우
리 산 섬이 아닙니까? 여가 또 (가거도 배들이) 섰었어요. 여기도 집이 있었어요. 우
물도 있고,
(여기는 뭐라고 불렀습니까?) 여기는 다순기미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주로 여기 덜
겅머리 끝에 섰었어요.
(사람들이 온다는 것은 물도 있고, 막걸리도 마시면서 쉴 수 있었던 곳이죠?) 옛날
에는 풍선 아닙니까. 소흑산도가 여기 있고, 올라오면, 만재도가 있습니다. 만재도까
지 나올 때 만재도 바다. 매무리섬이라고 매물이 바다. 그라고 인자, 그 사람들이 배
질을 할 때, 코스가 지그재그로 있어요. 그래서 여기 올라와야 잊어 불고 목포로 향
했죠. 아주 잊어 불고 가죠. 여기만 들어와 불면.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배
질을 했죠.
(그래서 봉도가 큰 역할을 했네요.) 우리가 여기 살면서도 소흑산도 배들이 닿았어요.
(서른 살 때 동력선으로 바뀌었어요?) 어렸을 때는 풍선을 못 봤어요. 웃마을에 살
았으니까 못 봤는데, 내가 살 때는 동력배지만 소흑산도 배가 간혹 왔어요. 우스개소
리가 있습니다만, 깜깜해, 잠자고 있으면 깨요. 눈 비비고 나오면 그 사람들이 바다에
서 오면 대개 콜라 같은 것, 소주 같은 것을 주라고 하죠. 그 당시에 가게를 막 할 때
니까. 한번은 잠자고 일어나서 사이다 콜라가 전부 이홉짜리 병에 담아 팔 때입니다.
그것이 저 뭣이냐, 장 담는 것 있죠. 간장원료 그 이름이 뭐요? 그 놈을 빼 줬단 말입
니다. 그놈이 끈끈해요. 그것을 먹고 나서 본께, 그 병이드란 말입니다. 그란디 그 사
람이 그것을 마시고 나서면서 “아따 싸하네...” 그 사람이 간 뒤로 얼마나 박장대
소를 하고 웃었어요. 그 사람도 술김이라, 술 먹고 술 깰라고. 그 당시에 이름이 카
멜... 뭐라고 써있었을 것이요.
내가 이 밑에가 가게였거든요. 밖에서 전방 문을 두드리니까 나왔죠. 술 먹고 속 타
니까 주라고 한 것이제. 나는 주고는 그 사람이 나가도록 기다리고 있지요. 나가고....
하하하. 참 지금도 생각하면 우스워요.
그 사람들은 보통 30명에서 40명씩 실어요. 예, 목포 간 사람들, 싣고 갔다고 싣고 오는 것이죠. 
(가거도에서도 올 때도 사람이 사는 데가 처음이고, 나갈 때도 마지막이니까 들르고 그랬군요?) 만재도 같은데는 안 들르고, 그 바다를 경유해서 지그재그로 오니까,
여기가 마지막이니까 들르고, 물 타고 올라갔다 물 타고 내려가니까. 물이 비슷하게
맞은 데는 아조 노래 부르고 다니지요. 물이 몇 물 오면 온다고 그러죠. 자기들 말로.
(가거도에서 여기까지 풍선으로 얼마나 걸린답니까?) 그 당시에는 빠르면 하루 낮
이면 옵디다. 그렇게 빨리 와요.
(아침에 출발하면 저녁에 와요?) 배는 봤는데, 앞이 똑 짤라진 밴데. 잘 와요. 여기
는 좋은 석이 아니예요. 하누바람 불면. 요런데가 아주 좋은 석이죠.
(석이라는 것은 자리를 말하나요?) 바람 불면 뉘가 안 들어오는 곳. 물결이 안 들어
오는데, 파도가 안 들어오는데, 뉘가 안 들어오는 곳. 그런 곳이 배석자리다. 울렁거
리는 나미가 안 들어오는데, 너무 높아도 안되고.
(여기는 무슨 나루라고 불렀습니까?) 여기서 말하기는 하태나루터라고 하지요. 여
기서는 팽야 뻘섬나루터라고 그랬죠. 이 섬 이름이 봉도죠. 벌-섬이라고 그러지요.
벌봉자를 써갖고. 원래 이름은 그렇게 안돼 있고, 내도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뻘내로.
여기 사람들이 봉도로 바꽜어요. 여기는 내도리,
나루터와 나루운영의 토착지식
배석자리라는 말은 잘 안쓰는 말인데... 하태나루터하고 거북바위나루터라고, 그라
고 상태나루터. 거벅바위나루터가 있어요.
(당두 끝을 뭐라고 불렀을까요?) 닭머리라고 그랬어요. 닭머리 같이 생겼다고 해서.
그런데 우리가 발음을 잘못해가지고 땅머리라고 했지요. 여기는 능산하고 장재 가는
나루터고요.
(개도도 있었을 것 아닙니까?) 개도는... 여기는 잘 모르겠습니다. 개도는 사람 산지
가 얼마 안된 것 같습디다.
(지도를 보면 나룻터가 얼른봐도 네 개는 됐겠네요. 지금도 나루터가 있다는데, 어
떤 곳입니까?) 저 건너서 70대 아주머니가 하고 있어요. 어른이 하시다가 돌아가셔서,
같이 타고 다녀봐서 알지.
(주로 어떤 사람이 다닙니까? ) 여기하고 여기 여객선 타임이 안 맞지 않습니까. 이
쪽으로 꼭 가야겠다는 사람들이 다니고. 신의면에는 중간배가 있어요. 12시30분에.
 
목포 나가는 놈이. 그런데 하의도가 중간배가 없어요. 공무원들이 주로 나루타고 거
기서 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고. 그리고 농협도 저 건너에 있으니까. 여기(거북나루)
가 훨씬 먼저 없어져 부렀어요. 이 나루(하태나루)는 옛날부터 신의 하의가 한 면으로
있을 때부터 다녔어요. 100년 이전부터 있었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 보면, 돈 안 받고
다녔어요. 나락한말씩 내면서, 엿가 받은다고 그러죠. 그라고 무료로 다니죠. 돈 내고.
(그때도 신의사람이 했어요?) 신의사람이 했어요. 항상 저 건네 사람들이 했지요.
여기 사람이 잠깐 한 적이 있어요. (부인의 이야기- 네, 친정이 신의면인데, 우리 오
빠들이 81세나 됐거든이라. 그때 저 건너 신의면에 학교가 없어서, 신의면 사람들은
나루를 이용해서 면사무소 있는데, 웅곡에 있는 학교를 다녔지라.)
(그때는 걸어 다녔을 것 아니예요?) 차도 없고. 걸어서 와서 나루를 타고, 또 걸어
서 학교에 가고. (딸을 가리키면서) 애들도 어렸을 때 웅곡까지 걸어 다녔어요.
저 건너서 여기에 와도 물쌀이 쌀 때는 사리에는 30분씩 걸려요. 물때가 좋고 바
람이 안 불때는 빨리 가지만, 많이 걸리면 30분이면 가. 썰물과 민물의 차이가 많이
날 때는 저 밑에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해서 엄청나게 시간이 많이 걸려요. 바로 못
오고, 쭉 갔다가 이렇게 내려오고, 바로 못 오고, 이렇게 갔다가 이 물이요 든물과 쓸
물이 대개 보면은, 요 지방에서는 동남쪽에서 올라온다 말입니다. 올라오면 이 물이
구석구석 다 가는 것이 아니라, 갓은 다 반대예요. 이놈이 올라간다면 가는 다 내려
와요. 여기가 올라가면 여기는 내려오고,
(올라가다 부딪혀서 내려오니까?) 그것을 보고 건지라고 그러죠. 건지, 이것은 골
물, 그 사이에 있는 것은 뒤건지라고 하고. 이것을 이용해서 다 노질해서 건너 다녀
요. 물이 차꼬 뒤건지라고 해요. 물이 뒤짚어진다고 해서.
(들물은 골물이라고 하고, 그러면 뒤건지는?) 대개 골물 따라 댕겨요.
(배가 가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뒤건지에서는 잘못하면 삥삥 돌아요. 제자리걸음
을 해요. 잘 젓어야 그 자리를 헤어 나올 것 아니예요. 그런 것을 이용해서 옛날에는
다 노 저어 다녔어요. 지금 이렇게 지금 배 타고 다닌 사람들은 뗏마고 큰배고 간에,
선장이 필요 없지만, 그때는 그래서 선장이 필요했어요. 반드시 선장이 필요한 이유
죠. 예를 들면 정면에서 바람이 와도 그냥 올라가요. 배가 돛달고, 지그재그 갈지자
로. 그냥, 돛 달고, 돛을 비스듬히 달고. 그것은 무슨 원리를 이용하냐면, 옆으로 바
람이 딱 채게... 만들어 가지고.
그래서 알고 보면 선장이 꼭 필요했어요. 지금은 아무도 키를 잡고 다닌디. 그 당시
 
에는 진자 모르면 고생하고 다녔죠. 사람들이.
(나루를 이야기할 때 건지하고 골물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네요. 저는 그냥 유래
정도만 쓸려고 했는데 안 쓸 수가 없네요)
글안하면 못 건너다녀요. 빤드시는 못 다녀요. 건너다닐 때 들물 때 이리 한참 올
라가요. 요만치나, 그 다음에 골물에 딱 빠쳐놓고, 힘차게 건너가요. 이 건너에서도 갓
은 내리니까 내려가요. 그 다음에 이쪽으로 붙어요. 언제든지 그런 식으로 배질을 하
지요. 옛날에는 무동력일 때는 안 그러면 다닐 수가 없어요.
(그래서 골물하고 건지를 구분할 수밖에 없구나) 안 그러면 고생을 하지요.
(이게 만약에 이 사이가 굴곡이 없었다면 그런 것이 없을 것 아닙니까?) 없지요. 그
런데 다 있어요. 어디든지 가면, 없는 데가 없어요. 그것을 보고 나룻터가 생긴 것입
니다. 나루터 위치는...
(여기가 들물이고, 여기가 썰물이죠?) 물을 보면 그냥 알아요. 배에서 물을 내려다
보면 아 저놈은 올라간다. 저것은 내려 간다 다 알아요. 
꽃게파시의 종료
배들이 계속 다니라고. 그라고 우리가 대일무역도 하고. 우리가 손해를 보드라도,
배가 계속 오라고. 그런디 난중에는 무슨 현상이 일어났냐면, 게가 발이 엉덩하잖아
요. 그물에 다 걸려 부러요. 그래서 그 근처에 사는 것이 다 걸려버려요. 이 앞에 바
다에서, 그래서 자원이 완전히 고갈돼 불드라고요. 자원이 안나니까.
(꽃게 배들이 어디에서 작업을 했습니까?) 바로 이 밑에서 잡았지요. 밖에, 매물바
다 안쪽에서 잡았지요.
거기서 몇 십 년, 10년 이상 해 버리니까 고갈돼 불어요. 그란디 인자 나잖아요. 지
금은 통발로 잡아요. 그러니까 싹쓸이는 아니지요. 그 당시에는 그물로 싹쓸이 해 버
렸어요. 그래서 우리가 망한 것이 그것 때문이예요.
배를 한 30척이나 이렇게 대 줬다가, 그 배들이 인자 안된께 우리집다 배를 다 두
고 그냥 가분 것이여. 우리 집에 놔 두고 간 사람들은 양심이 있는 사람이고, 즈그 집
앞에다 두고 서울로 가버려요. 당신이 배 찾으쑈 하고 가부러요. 적으면 삼사천만원,
적으면 이삼천만원인데 그 배가 몇 십척이니 얼마나 컸겄습니까.
나중에 그 배는 꽃게를 잡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어중간한 배들이거든요. 왜 그러냐면 밖에 나가서 소위 고대구리도 못하고,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할 배들이 예요.
잘면 10톤 이쪽 저쪽 클라스들. 커야 20~ 23톤되는데 어디 가도 행세 못할 배들이죠.
나만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아부렀제. 86년 말이예요. 그러니까 85년부터 배들이 거의 포기하고 올라가 부렀어요. 꽃게가 안 잡히니까.
빚을 져 부렀죠. 나 여기 아무것도 없이 왔어요. 버는 대로 염전도 사고, 뭣도 사고
장만해 가지고, 아까 15헥타 된다고. 그래 갖고 그런 것 장만한 것이 다 남는 것이었
는데, 결국은 그런 것이 다 없어지고. 그리고 다시 제방사업을 했어요. 집사람하고 나
하고 둘이.


손으로 제방을 막은 부부
예산 없이, 이 사람이랑 둘이서, 순노동력으로. 이렇게 해서 손이 이렇게 되부렀어
요. 한 7-8년 걸려 막았는가. 몇 년이 걸려서 막았어요. 그것이 안되니까, 내가 막은
자리가 원래 여기 이것 막고,
(여기 국토방조제라고 써 있네요) 네 여기는 잘잘한 애들 데리고 막았어요. 나 서른
살때, 여기는 한 50살 때. 남의 제방 막아주고. 여기 한나 막았어요. 1차, 전부해서
한 5개나 막았겠네요. 그런 제방을.
(이것을 막으려면 일단 수입이 없이 돈 만 들잖아요) 그러니까 순 힘으로만 만들었
다니까요. 미역, 다시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상상이 안되는데요?) 그러니까 이해가 안 될 것이요.
(이 당시에 여기를 막으면 여기서 어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도 해야 하잖아요?)
아무도 안했어요. 우리가 거기에다 정치어망을 했어요. 그러니까 누가 이야기를 못하
지요. 피리마을 간데 실로암이라고 거기 서 있잖아요. 거기 들어가면 건물이 다 우리
것이예요. 우리가 거기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밑에다가 원을 막은 거지라. 응, 식
초공장. 그 밑에 건물이 여러 채가 있잖아요. 전부 우리거라니까요.
바닷가에서 자연돌을 주워 가지고 스티로폼 배를 크게 만들어갔고, 물이 썼을 때
갯가에가 돌이 있잖아요. 굵은 돌이, 그것을 걸어 놓고 실어놔, 그러면 물이 들면 뜰
것 아니요. 그러면 원둑에다 부리고 부리고...
신안에서는 최고 깊은 제방이여. 물이 안써요 조금에는 전혀 안써요. 그런데 무슨
방법을 썼냐면 그 당시 솔잎혹파리가 유행해가지고 국가에서 전부 벤거예요 힘하나
 
안들이고, 운반만하면 가져다썼어요.
어떻게 하냐면 처음 한 식으로 했어요. 멍석질을 깔아 놓고 그 위에다 다시 질른거
예요. 그래갖고 줄을 걸어 놓고, 다시 한번 하고, 한번 더 삼단으로 해 놓으니까 제방
이 됩디다. 그래갖고 물을 막았어요. 물이 못 들어오게. 인자는 제방이 되았다 하고
이 사람하고 둘이서 새우를 길러야 쓰겄다 했는데, 회사도 떨어져서 없고. 그런데 계
속 해서 파도가 들어오니까 흙을 뽑아내요. 그래서 안되겠다 해서 스치로폼을 만들
어다가, 돌을 실어다가. 인자 세멘트를 모래하고 섞어서 가루처럼 인거예요. 세멘트를
발라놓고 돌을 놓고, 타우루식이예요. 그런데는 삽으로 깎아 버리고, 그렇게 해 놨는
데, 걸럭지식으로 해 놓은 거예요. 그렇게 한 2년간이나 한 후에 새우와 우럭을 넣었
는데, 파라피온 태풍이 왔어요 그래갖고 유실이 되부렀어요. 밑에만 남고 싹 깍아져
부렀어요. 그래갖고 그 당시 이채환 군의원한 분이, 그 동생한테 나 이렇게 되부렀네.
그랬더니, 아 그래라, 그러면 국가에서 보상이라도 받아야지라, 해서, 그 당시 보상이
이루어졌는데, 제방보상이 한 1억이나 줬을 것이요. 그것도 갚으라고 일부 주고. 그라
고 생물피해, 그 안에 새우하고 우럭하고 피해를 받은 것이 더 많데, 한 2억 받았을
것이요. 그래갖고 지금 제방을 만든 것이예요. 지금은 좋아요. 어느 정도.... 그런 도
중에 한 3년간 돌을 실어 날랐을 것이요. 3년간. 그래서 손이 이렇게 완전히 틀어져
부렀어요. 자고나면 이 사람하고 나가서 했으니. 인부는 생각도 못하고,
(여기 방조제는 소유는 선생님 것이죠?) 아니지요. 국가방조제지요. 면허만 가지고
하지요. 원래부터 내가 막을 때 내가 교회 장로요. 교회 다니면서 막았는데 이렇게 선
언을 했습디다. 내가 막아도 내 재산으로 안 만들고 사회에 내 놓는다고, 그렇게 서
언하고 했으니까 이행을 할거요.
(법으로는 막는 사람이 소유하지요?) 네 그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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